박사장 가족이 바캉스를 떠난 날 밤, 기택네 식구는 박사장 집 거실에서 술을 곁들인 가족 파티를 연다. 기택이 박사장의 아내가 의외로 순진하고 착한 구석이 있다고 평한다. 기택의 아내는 남편이 남의 아내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것에 심사가 상했는지 반론을 제기한다. “그게 다 여유 있으니까 착한 거야.” ▲ 한 인간의 고매한 품격도, 그 천박함도 아무리 감추려해도 감추어지지 않는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박사장 아내의 ‘착함’이 여유로움의 결과에 불과한 것인지 천성인지 혹은 교양인지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박사장 아내가 착하다는 것에는 기택네 식구 모두가 동의한다. 박사장 아내는 기택네 식구들의 평가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고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재벌 사모님들의 엽기적인 풍모와는 분명 차별화되는 ‘착함’도 있다. 가짜 대학생 괴외선생인 기택의 아들, 가짜 미국 유학파 미술치료사인 기택의 딸, 가짜 ‘최고 가정부’ 이력을 가진 기택의 아내, VIP만 전문으로 모신다는 가짜 운전기사 기택, 이 모든 ‘
우리에게 익숙한 계급·계층의 드라마는 대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고, 그 전선의 전후방에서 갈등과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는 조금 낯선 전선이 형성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아니라, 똑같이 ‘못 가진 자들’인 기택네와 지하실 남자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진다. ▲ 더이상 희망을 품고 상류층과 싸우지 않는다. 그저 걸리적거리는 '우리'와 싸울 뿐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기택의 대를 이어 백수의 세계에 안착한 아들에게는 명문대학에 다니는 부잣집 아들 친구가 있다. 친구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장받았지만 기택의 아들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온통 암울하기만 하다. 열패감이나 질투심에서라도 기택의 아들은 그 친구를 멀리할 법한데 그렇지도 않다. 그저 선망하고 부러워한다. 기죽어 지내지만 그렇다고 적개심을 갖진 않는다. 때때로 잘나가는 친구가 던져주는 ‘떡밥’을 머리 긁적이며 받아먹는다. 친구가 찾아와 해외연수를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우리가 ‘I love you’라고 말할 때, 그 ‘I’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I란 독립적이고 누군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족自足적인 개체여야 한다.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생충에 불과하다. 기생충의 사랑은 무의미하다.”- 러시아 소설가 아인 랜드 ▲ '정신적 기생충'의 사랑 방식은 지하실 남자의 그것처럼 불안하고 불온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러시아 태생의 미국 여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처럼 대단히 냉정하고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기생충’에서 문제적 인물인 ‘지하실 남자’는 자신이 기생하는 주인집 사장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 사랑’으로 충만하다. 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지독하게 사랑한다.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지하실 남자의 존재 이유 자체로 보인다. 사장님과는 물론 일면식도 없다. 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영화나 소설, 드라마의 질리지 않는 레퍼토리다. 부자는 악이고 가난한 자는 선인 명확한 선악 구도가 설정된다. 봉준호 감독은 전작 ‘설국열차’에서 이같은 방식으로 계급의 대립과 갈등을 그려냈다. 그러나 ‘기생충’은 빈부나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에서 많이 벗어난다. ▲ 공자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부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많은 작품 속에서 대개 부자들은 속물 근성에 찌들어 있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이중성을 보이며,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에 비하여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 양심, 상식, 교양을 두루 갖춘 ‘분’들이다. 부자놈들은 악이고 가난뱅이분들은 선인 명확한 선악 구도가 설정된다. 선악 구도란 단순명료하고 공감도 쉽다. 당연히 관객들은 못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영화를 따라간다. 계층의 부당함에 같이 분노하고 정의가 실현되기를 함께 갈망하며 감독이 부자를 불행과
기택네는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다. 우연한 기회에 부잣집 과외선생님으로 위장 취업한 아들을 필두로 딸과 아내, 그리고 기택까지 한집에 취업하면서 일가족의 사기 행각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기택네 가족이 악질 가족사기단은 아니다. 한집에 위장 취업하지만 그 집안을 말아먹을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 '선線이란 사회생활에서 항상 '문제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재수·삼수 끝에 대학 진학을 아예 포기한 기택의 아들은 어느 날 친구의 부탁을 받고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해 부잣집 영어 과외선생님으로 사기 취업한다. 해보니 별거 아니고 사모님은 생각보다 헐렁하고 순진하다. 곧이어 그의 여동생 역시 학력·경력을 몽땅 위조해 미술치료사로 위장 취업한다. 그리고 백수의 우두머리인 원조 백수 기택은 그 집의 운전기사로, 아내는 가정부 자리를 꿰차고 만다. 그야말로 일가족 사기단에 금맥이 터졌다. 기택네 일가족이 대단히 악질적인 가족사기단은 아니다. 범죄에도 생계형 범죄가 있고 기업형 범죄가 있다면, 기택네는 다분히 생계형 가족사기단이다. 일가족이 한집에 위장취업하지만 그 집
영화에 등장하는 ‘지하실 남자’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화 속 남자의 행태는 그의 비주얼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압도적이다. 주연 같은 조연이다. 집주인이 동거인으로 허락지도 않았는데 가정부인 아내에 묻어 남의 집에 잠입해 사람의 내장처럼 미로 같은 지하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다. 그야말로 기생충이다. ▲ 지하실 남자도 자신의 '충성서약'이 주인에게 전달되리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경건한 의식처럼 매달린다. 기생충이 몸속을 활개 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듯, 지하실 남자도 으리으리한 저택을 헤집고 다니는 법 없이 지하실에 꼼짝 않고 앉아 아내가 물어다 주는 아무것이나를 먹으며 지낸다. 지하실 한편에 꽤 많이 쌓여있는 수험 도서들로 미뤄 짐작건대 아마 공무원이나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하다 여의치 않았는가 싶다. 몸도 성치 않은 지하실 남자는 먹는 것 이외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먹는 일도 일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남자가 하루에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라곤 특이하게도 지하실 두꺼비집 전선을 이용해 어디론가 모스 부호를 끊임없이 보내는 일이다. 남의 집 지하실에 숨어서 사는 이 특이
‘기생충’이라는 말은 일단 결코 유쾌하지 않다. 이토록 혐오스러운 영화 제목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다. 포스터의 글씨체도 ‘기생충체’로 꼬불꼬불 그려놓아 제목만 봐도 속이 스멀댄다. ‘기생충’에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프랑스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나 프랑스 관객들은 꽤 비위가 좋은 모양이다. ▲ 우리 사회 곳곳에 기생충들이 과연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케티이미지뱅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회충·촌충·편충 같은 기생충들이 직접 출연하진 않으나 관람하는 내내 자연 도감에서 본 기생충들의 온갖 모습이 떠올라 떨치기 힘들다. 그 끔찍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내 몸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고역이고 악몽이다. ‘무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관람을 주저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아마도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는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들이 공식적·법적으로는 해방됐지만 실질적인 해방과 평등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은 곧 평등’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고 해서 일본과 평등해진 게 아닌 것처럼, 흑인들이 노예로부터 해방됐다고 즉시 백인과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 21세기 한국에선 많은 재벌이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960년대까지 미국의 남부 일부 주에서는 학교와 극장과 같은 공공시설, 화장실은 물론 대중교통수단까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부 주에서는 영화 속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흑인은 일몰 후엔 외출조차 금지됐다. 심야에 백인 운전사가 운전하는 캐딜락 뒷자리에 점잖게 앉아 국도를 달리던 돈 셜리는 흑인이 밤중에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된다. 백인들의 호텔 파티에 피아노 연주자로 초청된 돈 셜리지만, 화장실은 호텔 밖 ‘뒷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노예에서 해방은 됐지만 흑인들은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못하
1960년대로선 흔치 않게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 돈 셜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이라는 ‘야만성’을 체감하고 고민할 법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흑인 인권운동에 나서긴커녕 눈길조차 안 준다. 차별과 탄압에 대책 없이 울부짖는 흑인들도 꼴 보기 싫고, 거칠고 폭력적인 저항도 ‘인텔리’ 흑인이 보기엔 가당찮을 뿐이다. ▲ 모두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상대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인종차별의 모순과 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최고조였던 1960년대, 미국의 ‘이슬람 국가(Nations of Islam)’ 운동도 절정기를 맞는다. 아무리 기도하고 매달려도 자신들을 구원해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백인들의 신’인 예수를 포기하고 예수와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듯한 마호메트에게 달려가 하소연해 보기로 한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적의 적을 만나면 터무니없는 동지애가 불끈거리고 엔도르핀도 솟구친다. 말콤 X(Malcolm X)로 대표되는 이슬람 국가의 전
돈 셜리 박사는 흑인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백인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길 갈망한다.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지적이며, 백인들만의 배타적 영역인 클래식 피아노에도 발군의 역량을 지녔다. 객관적으로 백인보다 뒤처지는 구석이 없다. 백인 중에서도 능히 상위 1%에 들 만한 자격을 갖췄다. ▲ 어느 편에 설지 눈치 보느라 정신없는 박쥐 같은 사람들이 넘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이란 나라는 ‘시민 민족주의(civil na tionalism)’ 국가가 아니라 불행하게도 ‘인종 민족주의(racial nationalism)’ 국가다. ‘시민 민족주의’는 시민권을 부여받으면 누구든 같은 국민으로 받아들이지만, ‘인종 민족주의’ 사회에서는 시민권을 부여받아도 피부색이 다르면 그 시민권을 100% 인정해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주민등록증이라고 다 같은 주민등록증이 아닌 셈이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인종차별이 극성을 부리던 1960년대 미국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돈 셜리는 인종차별의 모든 불합리한 억압
돈 셜리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발휘해 18세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로 인정받지만 ‘흑인은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수 없다’는 1940년대 현실적 장벽에 좌절한다.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해 박사가 된 그는 음악의 꿈을 접을 수 없어 피아니스트의 삶에 재도전한다. ▲ 짝퉁은 항상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야 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속에 그려지는 흑인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저항과 타협의 모든 모습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여준다.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난들 흑인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걸 절감한 돈 셜리는 피아니스트 자리로 돌아오면서 전략적 타협을 선택한다. 백인들의 배타적 영역인 클래식 피아노를 포기하고 대신 흑인들에게도 허용되는 재즈 피아노로 방향을 수정한다. 그러나 클래식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어서 ‘클래식 재즈 피아노’라는 묘한 포지셔닝을 택한다. 좋게 보자면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라고 할
미국도 우리네처럼 알게 모르게 ‘족보’를 따진다. 미국 시민권이 있다고 모두 똑같은 미국인이 아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주류 사회는 흔히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통칭된다.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백인이되 영국 앵글로색슨 혈통이어야 하며, 남유럽계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여야 한다. ▲ 모두가 갑질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모두가 갑질의 피해자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이란 나라의 인종차별 문제는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제여서 어지간해서는 심드렁해지기도 하고 따분해지기 쉬운 주제다. 그러나 영화 ‘그린 북’은 토니 발레롱가라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등장시켜 미국의 인종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라틴계이며 가톨릭 전통을 지닌 이탈리계 미국인은 ‘진골’이나 ‘육두품’ 어디쯤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와스프의 ‘성골’ 신분은 아니다. 토니는 클럽에서 ‘성골’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간다. 어느날 클럽이 내부수리를 위해 휴